조계산문 송광사(수선사)의 제2대 사주인 진각국사 혜심은 1231년<辛卯> 3월 초에는 스승 보조국사께서 수행했던 예천 하가산 보문사를 찾아 참배하고 묵으면서 스승님을 사모하고 슬퍼하며 시를 짓고<무의자 시집 p293> 정혜결사를 시작한 팔공산 거조암을 참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안동 통판(通判)의 관아에서 법문하고 오어사에 가서 설법하였으며, 영덕의 사자갑 봉서사에서 대장경 경찬법회를 봉행하기도 하였다. 여름에 팔공산 청량암에서 울주 유수의 청으로 설법하고 대구 군수의 청으로 관음사에서 법회를 하였으며, 8월에는 비슬산 안흥사 등을 찾아 영남일대를 순례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듬해 1232년<壬辰>에 몽골군이 침입하여 지난해 팔공산에서 보았던 부인사의 초조대장경판을 불태워버리니, 이를 안타까워하여 병란을 진압하기 위한 진병(鎭兵)법회를 여러번 열었다.
1233년<癸巳>에 진각국사는 불심 깊은 고려에서 저 막강한 몽골군에 항거하기 위해서 대장경을 다시 조성하는 불사가 국민들의 심신을 결집하는 구심점이 될 수 있음을 알고 평소 그를 적극 후원해주던 정안(鄭晏 ?~1251)이 머물고 있는 하동으로 가서 그곳 양경사에서 여름안거를 지내게 된다. 물론 그때 계사년(癸巳年) 하안거 결제법문과 해제법문이 진각국사오록에 남아 있다.
정안은 하동이 본관으로 본래 이름은 분(奮)이었는데, 할아버지 정세유와 아버지 정숙첨은 고려 무신정권을 지탱해주던 세도가였다. 정숙첨은 최우의 장인이니 정안은 최우의 처남이 된다. 그는 총명하여 젊은시절 과거에 급제하여 진양(晉陽)의 수령이 되었다. 고종 4년(1217년)에 정숙첨이 사돈인 최충헌을 비판한 일로 미움을 받아 고향인 하동으로 유배되니, 정안은 모친이 연로하다는 핑계로 사직하고 하동으로 돌아와 정안산성을 개축하여 살았다.
정안은 음양, 산술, 의약, 음률 등에 정통하였으며 속세를 떠나 불교를 좋아하고 명산과 이름난 사찰을 찾아다니며 자연을 벗 삼으며 골짜기에 숨어 지내는 것을 좋아하였다. 정안은 혜심을 후원하면서 122년 하동 양경사의 경찬법회와 가까운 곤명 용복사의 경찬법회도 열게 하였고, 1223년에는 강월암을 창건하고 화방사를 창건할 때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혜심은 그의 처소를 일암(逸庵)이라 하고 명(銘)을 지어주고 그의 정자를 세심정이라 이름붙여 주기도 하였다.
혜심은 1216년 대선사(大禪師)로 추대되고 1220년에 진주 단속사(斷俗寺) 주지도 겸하게 되었으니, 수선사<송솽사>를 상주처로 삼고 단속사를 오가면서 자연히 하동과 남해를 자주 들리게 된다.
진양(진주)은 최씨 무신정권의 수장 인 최우(崔瑀)의 부친 최충헌 때부터 식읍지(食邑地)였다.
최우는 예전에 혜심을 수차례 개경으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하므로 최우는 자기의 두 아들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을 송광사로 보내어 혜심의 문하에 출가시키고 후원하였다.
뒤에 장남 만종은 산청의 단속사 주지가 되고, 차남 만전은 화순 쌍봉사 주지가 되었다가 훗날 환속하여 항몽투쟁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그가 곧 최항(崔沆 1209~1257년)이다.
진각국사는 1233년 하동에서 여름안거를 하는 동안 정안과 대장경의 재조불사에 대해 논의하며 남해도 둘러보게 된다.
지리산과 남해안 일대에는 산벚나무 후박나무 돌배나무 등이 많이 자생하고 있어 경판의 재목을 구하기 쉬우며, 벌채하여 뗏목을 만들어 섬진강이나 바다의 뱃길 따라 남해 관음포로 운반하여 바닷물에 절이고 건조하기에 적합하다. 그리고 노량해협의 급한 물살은 몽골군의 침입을 저지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이었다.
대장경의 재조불사(再造佛事)를 위해서는 막대한 경제력이 필요한데 진주 산청 하동 남해 일대에 방대한 토지를 소유한 최우와 불심 깊은 정안의 신심과 경제력은 그것이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
진각국사 혜심은 여름안거 동안 정안에게 대장경 재조불사의 부촉을 끝내고 7월에 다시 본사인 수선사(송광사)로 돌아와 혜수(慧修) 동량에게 진병법회를 열게 하고 설법하였다.
진각국사가 이해(1233년) 겨울 수선사에서 병이 나니 최우는 매우 놀라 왕에게 아뢰어 어의를 보내 진찰하게 하였다.
이듬해 1234년 봄에 월등사로 거처를 옮겼는데 6월 26일 마곡(麻谷) 등 문인들을 불러 여러 가지 일을 부촉하고 입적하였다.
그의 법을 이은 몽여(夢如:정진국사)는 정안과 그의 행장을 정리하여 최우에게 청하고 최우는 이를 왕에게 아뢰니 이규보가 비명을 짓고 김효인이 왕명을 받들어 쓰게 되었으니 강진 月南寺 趾의 진각국사 비가 그것이다.
정안은 최우와 진각국사의 후사를 논의하고 대장경 재조불사를 발원하였다.
최우는 1236년 임시수도 인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남해 현장에 분사도감을 두어 필수(筆手)와 각수(刻手) 등의 인력확보와 경판목재의 수집 등에 대한 준비를 하고 수기(守其)대사 등이 교감(校勘)하여 대장경을 판각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정안이 있었다. 정안은 대장경 재조불사를 진행하면서도 1241년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임명되어 과거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1245년(고종 32년) 최우는 대장경판을 보존하기 위해 강화도에 선원사(禪源寺)를 창건하고 낙성회를 열면서 수선사 제3대 청진국사의 제자인 혼원(混元)선사를 법주로 삼고 승려 3,000여명을 초청하였다.<혼원은 수선사 4세 진명국사이다.>
이듬해 인 1246년 5월에는 고종이 이곳 선원사에 행차하였다.
혼원은 초대 주지를 맡아 조계산문의 신화(神化), 신정(神定) 등 훌륭한 200여명의 승려를 거느리고 와서 주석하며 남해에서 판각된 대장경을 멀리 뱃길 따라 강화도의 신원사로 이운하였다.
1249년 최우는 팔만대장경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숨졌다.
그해 정안은 남해의 자기 집을 정림사(定林社)로 만들고 일연(一然)선사를 초청하여 불사를 주관하게 하여 대장경의 판각불사를 마무리 하였다.
드디어 1251년(고종 38년) 9월 25일(양력 10월 11일)에 16년에 걸친 대장경 불사가 완성되어 경판을 모두 강화도로 옮기고 고종이 선원사의 대장경 판당(板堂)에 행차하였다.
1252년 진각국사의 제자인 수선사 제3대 사주인 청진국사(淸眞國師)가 입적하게 되니 혼원은 천영(天英)에게 선원사 주지를 물려주고 수선사의 제4대 사주인 진명국사가 되었다.
1252년에 원오국사(圓悟國師)가 선원사 제2대 주지가 되어 4년 동안 재임하였으며 그는 수선사의 제5세 국사이며 원감국사(圓鑑國師)는 선원사에서 원오국사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으며 후에 수선사의 제6세 국사가 되었다.
이후 선원사 주지는 조계산문 수선사<송광사> 출신 승려들이 계속하여 맡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고려대장경의 재조판각불사는 바로 수선사가 그 발상지였기 때문이다.
고려대장경(2)
1993년 겨울이던가? 서지학자이신 서여(서여) 민영규 선생을 초청하여 송광사 강원에서 3일 동안 특강을 주선한 일이 있었다. 특강을 마친 다음 그 전해에 복원한 광원암으로 모시고 가서 눈이 소복이 쌓인 진각국사 원조탑(圓照塔)을 안내하여 참배하였다. 그때 선생께서 상기된 얼굴로 서지학자답게 “내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두 분이 있는데 한 분은 선문염송을 편찬하신 혜심스님이요, 또 한 분은 삼국유사를 쓰신 보각국사 일연 스님이다. 일연스님의 탑과 비문은 잘 알려져 있는데 강진 월남사지(月南寺趾)에 있는 부스러진 비석이 진각국사의 비석임은 내가 밝혔지만 이규보의 비문에‘광원사의 北麓에 탑을 모셨다.’는 진각국사 원조탑의 행방을 몰라 헤맸는데 오늘에서야 여기에서 이탑이 진각국사 원조탑 임을 확인하고 참배하게 되었으니 오늘은 내 생애에 가장 기쁜 날이다.”라고 하셨던 모습이 생생하다.
서여 선생께서는 일본 조동종 사원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는 <중편조동오위>의 저자가 바로 일연스님 임을 밝혀낸 분이기도 한데 이듬해 남해분사도감과 연관된 일연스님의 자취를 찾아 함께 남해도 답사하였다.
남해는 조계산문의 진각국사께서 최우와 정안에게 조성하도록 부촉하여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에 걸쳐 고려팔만대장경 경판을 조성하였던 곳이다.
1248년 최우는 둘째아들인 쌍봉사 주지 만전을 환속시켜 항(恒)으로 개명하고 후계자로 맡긴 뒤 이듬해 세상을 떠났으며 정안은 1249년 자신의 집을 정림사(定林寺)로 만들고 일연 스님을 초청하여 판각불사의 책임을 부탁하였다.
일연스님은 남해에 머무르는 동안 수선사의 스님들과 깊이 교류하며 보조국사의 저술이나 선문염송 등을 접하면서 간화선에 심취하여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이라는 주석서를 지었다.
그리고 수선사 3세 사주로 신원사의 주맹(主盟)이며 법왕으로 추앙받던 청진국사(淸眞國師) 소융(小融)화상이 제방에 유행되고 있는 조동종의 오위(五位)에 대한 오류를 낱낱이 지적해주던 탁월한 견해에 감복하기도 하였다.
1250년 정안이 행장을 정리하고 이규보가 비문을 지은 수선사 2세 진각국사 혜심의 비(碑)가 강진 월남사에 세워진다.
1251년 대장경 판각불사가 끝날 무렵 최항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한 외숙 인 정안을 백령도로 유배하여 제거하였고
1252년 청진국사 몽여 스님이 입적하게 된다.
일연은 정림사에서 8년간 머물다가 1236년<丙辰年> 여름에 남해 윤산(輪山)의 길상암으로 이주하여 지내면서 예전에 청진국사가 지적했던 조동오위에 대한 오류를 교정하고 보완하여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를 짓고 1260년 12월 8일에 봉소헌에서 그 서문을 붙여 판각을 하였다.
일연은 가지산문 출신이지만 평소 수선사 2세 진각국사의 선문염송에 심취하였고 청진국사처럼 어느 한 종파나 문파에 얽매이지 않고 선교(禪敎)를 원융하게 아우르는 조계산문의 승려들과 교유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던 까닭에 그는 ‘멀리 목우화상<보조스님>의 법을 잇는다.[遙嗣牧牛和尙]’고 하였다.
1257년 4월 최항이 죽으면서 고려는 무신정권과 기나긴 대몽항쟁이 수그러들고 1259년 6월 재위 46년 동안 무신들의 눈치를 살피며 30여년을 몽골의 침략에 시달리던 고종은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강화의 도성은 헐리게 된다.
일연은 1261년 원종(元宗)의 부름을 받고 12년 동안 머물던 남해를 떠나 강화도 선월사(禪月寺) 주지가 되고 1268년에 대장경 보판(補板)의 판각도 끝나게 되니 운해사에서 주맹이 되어 대장경낙성회를 열어 팔만대장경 판각 불사를 모두 회향하게 된다.
고려의 팔만대장경을 모신 선원사의 사주(社主)는 진명국사 혼원(混元), 원오국사 천영(天英)을 이어 자오국사 담당 성징(湛堂 聖澄), 자오의 제자인 원명국사 충감(圓明國師 沖鑑 1275~1339), 충감의 제자 죽간 굉연(竹磵 宏演), 식영 연감(息影 淵鑑) 등으로 이어가며 조계산문 송광사 출신 스님들이 지켜간다.
1300년 경 선원사의 주지로 재직한 혜감국사(慧鑑國師)는 수선사 제10세 국사가 되었으며 선원사에 주석할 때 원나라 몽산덕이(夢山德異) 스님이 보내준 육조단경을 선원사에서 간행하였다.
그 후 식영 연감(息影 淵鑑) 스님은 선원사 복원을 위해 상소문을 지어 중흥에 힘썼고 환암 혼수(幻庵 混修) 스님은 선원사에서 식영 스님으로부터 능엄경을 배운 후 나중에 수선사 주지가 되었다.
이처럼 선원사는 조계산 수선사와 더불어 고려시대 제2대 선찰로 명성이 높았으며 진명혼원(眞明混元), 원오천영(圓悟天英), 원감충지(圓鑑沖止), 혜감만항(慧鑑萬恒), 식영연감(息影淵鑑), 환암혼수(幻庵混修) 등 고려시대를 풍미하던 조계산문의 덕 높은 선승들이 법통을 이어왔다.
신원사 초대 사주는 수선사 4세인 진명국사 혼원(眞明國師 混元)이었고 2세는 수선사 5세인 천영 원오국사이다. 이어 3세는 자오(慈悟)국사, 4세는 원명